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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615의 세상 이야기/당당한 목소리내기

제주 4.3 항쟁 기행을 통해 동백꽃을 다시 본다.

제주4.3항쟁 70주년을 맞았습니다.

이번 제주4.3항쟁을 맞으며 70주년 기념사업회는 "역사에 정의를 4.3에 정명을"이라는 슬로건을 제시했습니다.

처음 이 슬로건을 접했을때 '4.3에 정명'을 이라는 슬로건이 어색하고 그 이유를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학생운동을 오랫동안 했던 경험에 제주4.3은 저에게 단순한 사건은 아니고 4.3항쟁이라는 말이 더 자연스러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4.3에 정명을' 이란 슬로건은 불필요하다는 느낌도 있었고,왜 아직까지도...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광주민주화운동, 광주민중항쟁, 6월 민주항쟁 등과 같이 이름을 가지면 될게 아닌가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랑쉬오름에서 바라본 아끈다랑쉬오름 이곳일대도 민간인 학살이 일어난 곳이네요)



하지만 이런 생각은 4.3을 그저 책과 몇차례의 강연, 자료집으로만 접한 짧은 생각이라고 이번 제주4.3기행을 통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신혼여행을 포함해서 그동안 여러차례 제주여행을 다녀왔고, 절친한 분들이 제주에 많이 살고 계시는데도 제주의 역사와 4.3에 대해서 깊이 살펴 보고 체험하기 위한 노력이 많이 부족했다는 것을 이번 제주4.3기행을 통해서 깨달았습니다. 그저 제주역사박물관, 평화박물관을 다녀오고 이런저런 책자를 좀 봤으니 대강 역사는 알았다고 생각한것 같습니다. 제주의 가장 가슴아픈 현대사인 4.3을 구체적으로 만나고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없었기에 그동안 만난 제주는 풍광이 아름다운 섬, 한라산의 위용이 멋진 곳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이번 제주4.3기행은 이런 피상적인 제주에 대한 인식을 크게 바꿔준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삼별초의 항몽 역사로부터 조선조를 거치고 일제강점기와 해방후 미군정의 폭정이 살벌한 현대사까지 제주의 역사를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세심한 강연이 이번 기행의 시작이었는데 미리 읽고 온 70주년기념사회의 "4.3이 머우꽈?" 자료집(클릭하면 자료집 페이지로 연결됩니다.)과 함께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더불어 4.3 민간인 학살지와 일제강점기 군사시설 등을 방문하며 직접 보고 느낀 제주의 피맺힌 역사는 그야말로 모골이 송연해 지는 경험이었습니다.


(영화 '지슬' 촬영장이었던 도엣궤 입구에는 누가 일부러 놓아둔듯 동백꽃이 떨어져 있엇습니다.)



큰넓궤를 방문하기 위해서 처음 동광분교앞을 시작으로 동광리 마을을 지나며 듣는 해설에 마음은 무거웠습니다. 아름다운 돌담과 밭들이 대나무숲에 기대어 이곳저곳 옹기종기 모여있는 눈부신 풍경이 4.3학살로 인해 불타고 사라진 마을의 돌담과 집터라는 얘기에 "도대체 왜!!!"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우는 아이를 혹여나 토벌대에 들킬새라 조심히 업고, 숨을 죽이며 한라산 중산간 산길을 걷고 걸어 큰넓궤에 숨죽인 생활을 수개월하며 버텨갔다는 이야기도 그저 먹먹할 뿐이었습니다.

지금도 입구에 서기만해도 서늘한 바람이 새어나오고, 굴 안으로는 아무리 눈을 크게 떠도 온통 암흑뿐이었을 생활이 아닌 생활, 생존의 시간들이 지금도 큰넓궤에는 깊이 남아있었습니다. 큰넓궤로 피신하여 생활하며 저항해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지슬'의 촬영지도 큰넓궤 바로 인근에 있어서 방문해 보았는데요. 그곳도 제주 4.3의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곳이었습니다. 역사를 모르고 방문했다면 땀흘려 오르는 산행길에 잠시 시원한 바람 주는 그늘로 여겼을지도 몰랐을 곳이었습니다.

제주4.3기행의 방문지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눈앞에 정방산이 그림처럼 펼쳐져있는 '백조일손지묘'였습니다.

1950년 모슬포 관내(현재 한림읍, 대정읍, 한경면, 안덕면)에 거주하던 순박한 농민, 마을유지, 교육자, 공무원, 청년단체장, 학생 등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군, 경의 자의적 판단으로 사법 절차 없이 무참히 학살당한 백서른두위의 원혼을 모신 곳이라고 합니다. 주민들은 자신들이 인근 섯알오름의 탄약고로 끌려가자 죽음을 예감하고 가족들이 자신을 나중에 찾을 수 있도록 고무신 등을 벗어 길에 흔적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날때까지 가족들은 군에 의해 근접조차 하지 못했다고 하고, 박정희 정권은 후손들이 마련한 묘비마저 파괴한 잔혹한 짓을 저질렀다고 합니다. 




제주4.3의 역사는 해방을 맞았음에도 분단으로 치닫는 조국을 하나로 이으려는 절절한 몸부림이었고, 분단으로 인한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웅변하는 역사였다는 것을 방문지마다에서 알 수 있었습니다.

해방이 되었어도 미군정의 폭압은 살벌했고 스스로 새로운 나라를 바르게 세워 가려는 주민들의 열망에 찬물을 끼얹으며 심지어 시위에 나선 맨손의 도민에게 총을 쏴 죽이기까지 했으니 스스로 이에 맞선 파업과 무장은 자연스런 결과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미군정의 지휘와 분단에 기생하려는 세력의 가혹한 탄압으로 제주는 정말 핏빛으로 물들게 되었습니다. 작게는 3만여 많게는 8만여까지 추측되는 학살규모는 제주도민이 당시 30여만정도였다는 것에 비추면 어디서도 유래를 찾기 어려운 탄압이었습니다. 그러니 제주 어디를 가도 학살지가 아닌 곳이 없다는 얘기가 이번 제주4.3기행을 통해 더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알뜨르비행장터에서 바라본 정방산, 이 아름다운 곳에서도 학살은 있었다.)

(섯알오름입구에서)


제주의 현대사를 처음으로 작지만 의미있게 마주한 이번 역사기행을 하고나서 다시 동백꽃을 봅니다. 선홍색 짙은 동백꽃의 자태가 아름답지만 그 외침이 붉고 붉어 동백꽃을 다시 보고 다시 보게 됩니다.

앞으로도 간혹 제주를 찾을 일이 있겠는데요. 꼭 가슴아픈 역사의 현장을 한 곳씩이라도 꾸준히 방문하며 잊지 않고, 기억하고 바로세워 나가는 일에 마음이라도 보태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학살은 너무나 많은 곳에서 무차별로 일어났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는 과정있습니다. 학살은 복잡했고, 잔혹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제주4.3이 제대로 이름을 가지 못했지만 앞으로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에 그 이름이 살아날 것이라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이 너무나 늦었지만 이제라도 정부와 국민들이 나서서 제주의 아픔을 서로 위로하고 보듬어간다면 제 이름을 머지 않아 찾을 것이라 생각하게 됩니다. 

다시 70주년 기념사업회의 슬로건을 봅니다. "역사에 정의를 4.3에 정명을"

4.3에 정명을 새기는 과정은 결국 역사에 정의를 세우는 과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제주4.3 70주년을 맞아 다시 한 번 깊이 고개숙이며 역사를 바로세우는 과정에 작은 힘이라도 보태야겠다 다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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