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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615의 세상 이야기/사회와 여론 & 이슈

폭력과 비폭력의 사이에서(7월17일 제헌절 촛불집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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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부터 청계광장을 가득메운 시민들


저는 그리 용감한 시민은 못됩니다.
어느 분들처럼 시위대의 맨 앞에서 밧줄을 당기고, 차벽을 부수고, 버스에 올라 태극기를 흔들지도 못합니다.


그저 촛불을 들고 "재협상을 실시하라, 이명박은 물러나라"를 힘차게 외치는게 전부입니다.


물론 그 누구보다 용감하게 앞에서 싸우는 시민들에게 무한한 존경과 감사를 드릴 뿐인 소심하고 겁많은 시민이고 늘 맨앞과 맨뒤의 사이에서 알량한 용기와 양심을 붙들고 갈등하고 고민하는 사람입니다.


어제는 7월 17일 제헌절을 맞아 열린 의미깊은 촛불문화제가 청계광장에서 열렸습니다.


이미 시청 광장은 경찰의 버스로 성벽처럼 변해버린지라 시민들은 청계광장으로 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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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아름다운 촛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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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들이 많았던 촛불집회


촛불이 하나 둘 켜지고 어느새 청계광장을 가득메운 시민들은 다시 한 목소리를 내고 함성과 촛불의 바다를 이루며 변하지 않는 국민의 뜻을 과시하였습니다.


금강산 사고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사태로 어수선한 시국에서도 촛불들은 흐트러짐없이 자신의 길을 꿋꿋이 가고 있다는 인상이 강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미 촛불들의 외침은 재협상을 훌쩍 넘어 사회 전분야에 걸친 이명박 정부의 실정을 규탄하고 질책하고 있었습니다.


한 시민이 모처럼 촛불집회에 참가했다며 하신 말씀이 참 와닿았습니다. "오늘 촛불집회는 그 어느때보다 다양한 요구와 목소리가 한데 어우러진 자리인것 같다. 아마도 여기에 모인 이 많은 국민들의 다양하고, 정당한 요구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촛불은 꺼지지 않을 것 같다"라는 이야기는 촛불의 가는 길이 어떤 길인지 잘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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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에서 농성중인 수배자들이 인사를 나왔습니다.


범국민대책위가 많은 탄압을 받고 있어서인지 무대도, 음향도, 조명도 제대로 준비가 되질 못했고 그러하다보니 행사는 다소 지루하고 집중성이 떨어진 측면은 아쉬웠습니다. 그러나 촛불은 한 시민의 말처럼 변함없이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청계광장에서 행사가 끝나고 종로와 조계사, 안국동을 거쳐 일본대사관까지 이르는 행진에서 시민들의 기세는 더욱 높아졌습니다. 또한 보수언론의 보도와는 달리 여전히 거리의 시민들은 격려를 보내고 함께 행진에 합류도 해주었습니다.


일본대사관 앞도 경찰의 차벽으로 막혀있어서 우리의 함성만 들려주며 일본의 만행을 경고하였습니다. 어제밤 일본대사관은 어둠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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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대사관앞에서 항의하는 시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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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죽인 일본 대사관


다시 시내 방면으로 행진을 한다고 해서 대열을 따라 일본 대사관 골목을 벗어나려는 순간 너무나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경찰은 물대포를 쏘고, 경고방송을 하는 등 매우 폭력적인 대응을 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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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대포를 쏘는 경찰


'어? 일본대사관에 항의하고 있는데 도대체 경찰은 왜 난리지?'


그런데 곧 그 이유를 알것 같았습니다.


청와대로 향하고자 하는 일부 시민들이 적극적인 의사표현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까이가서 사진을 담지는 못했지만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소리와 시위대의 앞쪽에서 온 듯한 물에 젖은 젊은이의 손에 쥐여져 있는 쇠파이프를 보면서 경위를 짐작할 수 있을 듯 했습니다.


이미 안국동 동십자각 방면 청와대로 가는 길에서는 청와대로 향하는 시민과 경찰사이에 충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대책위에서 준비한 방송차량과 대책위의 행진제안에 공감하는 시민과 단체들은 평화적인 행진을 주장했고 안국동 종로경찰서 방면으로 행진을 진행하였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는 그동안 많이 들었던 논쟁이 오고 갔습니다. 대책위는 빠져라, 비겁한 놈들, 앞에서는 싸우고 있는데 왜 도망가냐, 열지도 못할 차벽에 맞서 쇠파이프만 휘둘러 뭐합니까, 행진이라도 합시다. 싸우자, 행진도 싸우는 것이다, 오고가는 욕설들, 주장들, 아까 나타났던 쇠파이프를 든 젊은이의 울분과 위협...


그렇게 우리가 우리를 상대로 싸우며 싸움과 행진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행진을 하려던 시민들도 결국은 멀리 가지 못하고 뒤에서라도 자리를 지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앞에서 싸우는 시민들을 차마 두고 갈 수 없었을 테니까요...


이제 안국동 사거리를 사이에 두고 대열은 길게 늘어졌고 그만큼이나 대열엔 패기와 힘이 넘쳐나질 못했습니다. 그런 틈에 정독도서관 골목에서 경찰병력이 나타났고 또다시 방송차 주변에서는 학생들이 가서 막아라, 말아라 고성이 오가고 대책위 방송차가 골목을 막아라, 말아라 언쟁이 오가고 있었습니다.


정말 가장 괴롭고 힘든 순간들입니다.
정말 용기가 넘치고 정의감이 충만하다면 저도 앞으로 나아가 싸우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습니다. 그러나 저의 용기는 안국동 사거리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있는 것 뿐입니다.


그저 행진이라도 하면 소리 소리를 지르며 따라가겠지만 이미 앞에서 용감하게 싸우고 있는 시민들앞에서 그런 저의 마음은 비겁한 자의 변명 밖에 안되는것 같았습니다.


벌써 70회가 넘는 촛불집회의 현장에 수없이 참가했지만 어제처럼 마음이 아프고, 심하게 갈등한 날은 없었던것 같습니다.


저는 아직은 우리가 더욱 비폭력적이고, 평화적인 방식으로 시민들과 함께하는 방식을 택해야할 시점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대열의 선두에서 싸우는 시민들을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촛불이 천갈래 만갈래, 천가지 만가지의 다양함을 하나로 모아가는 과정일 때 승리할 것이란 점입니다. 결코 우리의 촛불이 몇차례 수십만이 모였다하여 이제 천갈래 만갈래 갈라지는 것으로, 천가지 만가지 의견으로 나누어진다고 승리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어제밤 쇠파이프를 휘두르고 격렬하게 저항한 시민들은 더 충분히 자신의 생각을 관철하기 위해 시민들에게 동의를 구했어야 했습니다. 최소한 그렇게 하겠다는 의사라도 미리 전해주었어야 했습니다. 대책위는 그저 차를 뒤로 뺄것이 아니라 비폭력, 평화시위의 기조를 가지고 있었다면 더 적극적으로 시민들의 행동일치를 위해 호소했어야 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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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국동 사거리에서...


그저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식으로 등을 돌려 움직여버리고, 서로를 욕하는 사이에 안국동 사거리에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양심의 한가닥을 붙들고 자신의 용기를 시험대에 올리고 있는 많은 시민들의 촛불이 꺼져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저는 다시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갈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촛불을 들었을때의 외침 그 무엇도 해결되지 않았기에 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더 이해하고 의견의 일치, 행동의 일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이제 목소리를 더 내려고 합니다.


7월 17일 제헌절 촛불집회를 계기로 우리의 촛불이 더욱 거대해지고, 위력해지는 출발점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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