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 그리고 여가/책읽는사람들

투명함이 과연 신뢰를 주는가? 투명사회 (한병철, 문학과 지성사)

투명사회

지은이 한병철

옮긴이 김태환

펴낸곳 문학과 지성사



투명사회라는 제목을 보고 책에 대한 처음 인상은 우리 사회가 더욱 투명한 사회로 나가야 한다는 메세지를 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더 많은 민주주의와 진보를 위해서 '투명하게'라는 명제가 당연한 것으로 그동안 생각했고 그것이 옳다고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투명성이라는 것이 가지는 현대사회에서의 의미가 전혀 다른 차원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철학적인 접근을 통해서 투명사회가 곧 통제사회로 이어지고 정치적인 결집과 행동에 장애를 조성하며 결국 살아있는 정치가 아닌 죽은 정치를 보편화 할 수 있다는 것에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디지털 매체의 발전과 정보의 과다, 깊이가 없는 온라인 소통과 소통에 대한 강요가 투명성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 삶을 어떻게 통제하고 있는지 저자의 깊이 있는 분석을 통해서 새롭게 인식하게 되는 책이었습니다.


다만 많은 철학적 내용이 나오다 보니 쉽게 읽히지는 않았네요...ㅠㅠ(저의 철학 소양에 깊은 반성이... 생각해 보니 예전에 읽은 정의란 무엇인가도 어렵게 읽었던것 같네요...)


책이 전체적으로 양이 많지 않고, 부분 부분 끊어서 읽어도 의미가 있기 때문에 아주 읽기 어렵지는 않지만 철학적인 소양이 있다면 더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매일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카톡 등 SNS 홍수 속에 자신과 사회의 일상을 꼬박 꼬박 공유하며 살아가는 요즘에 이 책을 통해서 삶에 대해서, 사회, 정치라는 영역에 대해서 스스로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진다면 이 책의 역할은 충분하다고 생각됩니다. 


아래는 책에서 인상적인 대목들을 추려본건데요. 짧게 짧게 추리다보니 맥락의 이해 없이는 의미를 알기 어려운 부분도 있겠지만 책에 대한 호기심을 높이기 위한 것이니 한 번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



오늘날 "투명성"이란 단어는 마치 유령처럼 모든 삶의 영역을 떠돌고 있다. 정치에서는 물론이고 경제에서도 투명성이 강조된다. 투명성은 더 많은 민주주의, 더 많은 정보의 자유, 더 높은 효율성을 가져다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투명성이 신뢰를 낳는다. 이것이 요즘 유행하는 믿음이다. 이때 사람들이 잊고 있는 것은 하필이면 신뢰가 급격하게 의미를 잃어가고 있는 사회에서 투명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대단히 높아졌다는 사실이다.

오늘날처럼 정보를 쉽게 구할 수 있게 된 사회에서는 신뢰에서 통제로의 시스템적 전환이 일어난다. 투명사회는 신뢰사회가 아니라 통제사회다.

.......

투명성은 이데올로기다. 모든 이데올로기가 그러하듯이 투명성의 이데올로기 또한 긍정적인 핵심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 핵심이 신화화되고 절대화된다는 데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위험성이 있다. 전제적 지배자가 된 투명성은 테러가 된다.


투명사회는 정보의 공백도 시각의 공백도 용인하지 못한다. 하지만 사유도 영감도 어떤 빈자리를 필요로 한다. 게다가 행복이란 단어는 빈틈에서 유래한 것이다. 행복은 중고지 독일어에서는 gelucke였다. 빈틈의 부정성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는 사회는 행복이 없는 사회이다. 시각의 빈틈이 없는 사랑은 포르노이다. 그리고 지식의 빈틈이 없다면 사유는 계산으로 전락하고 만다.


오늘의 통제사회는 특수한 파놉티콘적 구조를 보여준다. 서로 격리되고 고립되어 있는 벤담식 파놉티콘의 수감자들과는 반대로 현대 통제사회의 주민들은 네트워크화되어 서로 맹렬하게 커뮤니케이션하고 있다. 고립을 통한 고독이 아니라 과도한 커뮤니케이션이 투명성을 보장한다. 디지털 파놉티콘의 특수성은 무엇보다도 그 속의 주민들 스스로가 자기를 전시하고 노출함으로써 파놉티콘의 건설과 유지에 능동적으로 기여한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파놉티콘적 시장에 전시한다. 포르노적 과시와 파놉티콘적 통제가 서로를 넘나든다. 노출증과 관음증이 디지털 파놉티콘인 인터넷을 살찌운다. 주체가 외적인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가발전적인 욕구에 의해서 스스로를 노출할때, 그러니까 자신의 사적이고 은밀한 영역을 잃게 될까 하는 두려움이 그것을 버젓이 드러내놓고자 하는 욕망에 밀려 날 때, 통제사회는 완성된다.


투명사회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공동체가 형성되지 않는다. 단지 공동의 관심을 좇거나 하나의 상표를 중심으로 모인 여러 에고(ego)의 집합(브랜드 커뮤니티)처럼, 고립된 개인들의 우연한 무리(ansammlung)가 생겨날 뿐이다. 그러한 무리는 공동의 정치적 행동을 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의 모임, 즉 '우리'가 될 수 있는 집회(verammlung)와 구별된다. 무리에는 정신이 결여되어 있다.


디지털 혁명 이후 우리는 슈미트의 주권 명제를 다시 한 번 고쳐 쓰게 될 것이다. 주권자란 인터넷 악플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자이다.


격분사회는 스캔들의 사회다. 이런 사회에는 침착함, 자제력이 없다. 격분의 물결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반항기, 히스테리, 완고함은 신중하고 객관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허용하지 않는다. 어떤 대화도, 어떤 논의도 불가능하다. 자제력은 공론장의 본질적 요소다. 또한 거리는 공론장을 형성하는 데 필수적이다. 게다가 격분의 물결 속에서는 공동체와의 동일시 정도도 매우 낮게 나타난다. 격분 속에서는 사회 전체에 대한 염려의 구조를 갖춘 안정적인 우리가 형성되지 않는다. 이른바 분개한 시민의 염려라는 것도 사회 전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대체로 자신에 대한 염려일 뿐이다. 따라서 그러한 염려는 금세 모래알처럼 흩어져버린다.


행동을 함께하기로 결단한 군중만이 권력을 산출한다. 군중은 권력이다. 디지털 무리에서는 이러한 결연함을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행진하지 않는다. 디지털 무리는 갑자기 생겨났다가 갑자기 사라진다. 이러한 휘발성에서는 정치적 에너지가 나올 수 없다. 악플 역시 지배적인 권력관계를 동요시키지는 못한다. 악플은 그저 개개인에게 달려들어 망신을 주고 추문에 빠뜨릴 뿐이다.


제국에서는 아무도 지배하지 않는다. 제국은 모두를 뒤덮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 그 자체다. 이렇게 오늘날에는 지배 없는 착취가 가능해진 것이다.


투명성의 독재 속에서는 주류에서 벗어나는 의견이나 일반적이지 않은 아이디어는 아예 입 밖으로 꺼내기도 어려워진다. 과감한 도전은 거의 시도되지 않는다. 투명성의 명령은 강력한 순응에의 강제를 낳는다.


모든 탄생은 새로운 시작에 대한 약속이다. 행동한다는 것은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게 한다는 것이다.


디지털은 수와 셈을 절대화한다. 페이스북 친구들도 무엇보다 숫자로 세어진다. 하지만 우정은 이야기다.


투명사회에도 이면이 있다. 투명사회란 어떤 의미에서 표면적 현상이다. 투명사회의 뒤편, 또는 그 아래에서 모든 투명성을 벗어나는 유령들의 공간이 생겨난다.


정보피로증후군(IFS)은 정보의 과다에서 오는 심리 질환이다. 환자들은 분석적 능력의 저하, 주의산만증, 전반적인 불안감,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는 무기력함을 호소한다.


정보피로증후군의 주용 증상은 분석적 능력의 마비다. 분석적 능력이야말로 사유의 본질을 이루는 부분이다. ....... 사유를 위해서는 구분과 선별의 부정성이 필수적이다. 사유는 언제나 배제하는 작용이다.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 또한 정보피로증후군의 증상에 속한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일정한 정신적, 시간적 조건에 결부되어 있는 행위다. 책임은 우선 구속되어 있음을 전제한다. 약속이나 신뢰와 마찬가지로 책임 역시 미래를 묶어둔다. 약속, 신뢰, 책임은 미래를 안정시킨다. 반면 오늘날의 커뮤니케이션 매체들은 의무의 자유, 임의성, 즉흥성을 장려한다. 









반응형